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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정유재란의 참패, 패장 원균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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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의 역사적 사실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약력은 생략하기로 

 

 

 

 

 

 

경기도 평택의 원균(元均 1540~1597) 묘 입구

주변에 주차할 곳이 마당치 않아 홍살문 옆에 잠시 주차하였다

 

 

 

 

 

원균은 이순신장군과의 갈등으로 이순신 장군을 하옥시키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1597년 7월 거제도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불리해지자 함대에 스스로 불사르고 병력을 육지에 내리게 하여

모두 학살당하고 대패하여  바다의 통제권을 왜군에게 넘겨주었다

정유재란의 시작이었다

 

 

 

 

 

원균은 전사했을까 도망갔을까

 

원균은 칠천량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반론이 만만치 않다

전투에서 패 한 후 도망가는 원균을 보았다는 기록과 각지에서 도망 다니는 원균을 보았다는 증언들이 많이 있었고

권율장군이 목격자까지 직접 확보하였다고 하고 도망가서 숨어 살다 죽었다는 말도 있다

특히 통영에 무명인 묘가 있는데 그 묘가 원균의 묘라는 말도 있다 (나무위키 발췌)

 

 

 

 

 

 

그래서 궁금한 원균의 묘인데 이 묘는 가묘이다

 

 

 

 

 

 

칠천량 전투 후에도 원균의 시신은 수습이 안되었다 한다

 

 

 

 

 

 

 

 

 

 

 

 

 

 

 

 

 

 

원균의 묘 아래에 작은 묘가 보여 아래로 내려갔다

 

 

 

 

 

애마총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이 죽자 선조가 하사한 애마가 그의 유품을 입에 물고

천리길을 달려와 주인의 죽음을 알리고 지쳐서 죽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주인의 무덤 곁에 조그만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비문에 적었다

 

 

 

 

 

 

옆에 원균 기념관이 보여 잠시 들어가 본다

 

 

 

 

 

 

 

 

 

 

 

 

조선 수군의 전투함 판옥선 모형

 

이순신이 하옥당하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배 160여 척으로 한산도로 출발하였으나

적의 교란작전에 휘말리고 능력이 안 되는 원균 때문에 4백 명의 아군이 수장당하고 판옥선 대부분도 수장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수군에게는 배 12척만 남았다 

 

 

 

 

 

 

기념관을 돌아보니 예전에 배운 것과는 달리 칭찬과 업적 일색이고 역사의 과는 하나도 없다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가 원균옹호론에 기반하여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위키 발췌)

 

 

 

 

 

 

인증샷은 방명록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존경받는 이순신장군과의 갈등으로 안 좋은 면이 많이 부각되고

평가절하 된 면도 물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의견이 있어서 장군이라는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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